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안문 6.4 항쟁 (문단 편집) == 결과 == 천안문 사건 일주일 뒤, 시위를 주도한 자들에게는 당초 약속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뒤집고 대거 '''수배령'''이 떨어졌다. 특히 다수의 학생 시위대를 겨냥한 21명의 블랙 리스트가 언론 매체에 퍼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시기에 잡혀들어가 중형을 언도받거나 국외로 추방되었고, 혹은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국외로 망명했다. 이들을 돕기 위한 망명 작전이 바로 '[[카나리아]] 작전'이다. 카나리아 작전은 서방 국가나 홍콩, 대만 시민들과 민주화에 찬성하는 남중국 시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많은 수의 해외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중국 학자들과 뜻있는 시민들이 이 시기 반체제 지식인들을 위해 비자를 발급해주고 비행기나 배 등의 수단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왔다. 후술할 우얼카이시와 차이링 또는 탱크맨 등이 이 작전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파일:external/home.zcu.cz/pict516.jpg]] 지명수배 1호였던 베이징대 역사학과 1학년 '''왕단(王丹)'''은 1991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993년에 가석방되었지만 1995년에 체제 전복 기도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1996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1998년에 빌 클린턴의 요청으로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질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만의 타이완국립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교단에 서게되었다. 현재는 동오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다. 참고로 미혼이며, 친중단체에서는 이걸 빌미로 동성애자가 아니냐[* 중국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지 않다.]며 시비를 걸기도 했다. 더불어 덩샤오핑의 강경진압은 사정없이 비판하지만, 경제정책에는 어느정도 긍정적인 면을 보이며, 나아가 덩샤오핑 파벌에서 싫어하는 마오쩌둥의 업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2017년 6월에 대만 내 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복귀하였다. 2019년에는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2969743|#]] [[파일:external/bilder.bild.de/3,w=559,c=0.bild.jpg]] 지명수배 2호였던 베이징사범대학생이자 [[위구르]]족 출신인 외르케슈 될레트(ئۆركەش دۆلەت/Örkesh Dölet)[* 영어로는 Uerkesh Davlet로 표기한다.] 중국명 '''우얼카이시 둬라이티(吾尔开希 多莱特)'''는 상당한 강경파 성향으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리펑 총리가 직접 찾아오자 그에게 대화 주제는 자신들이 정할테니 듣기만 하란 식의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조영남 교수는 이를 '건방진 태도'였다고 표현했다. 시위 이후 홍콩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지만[* 사태 종식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약 3분 정도의 VHS 테이프를 대만 방송사에 보냈는데, 상당히 침통한 표정과 함께 자신의 주장을 조목조목 밝히기도 했다.] 졸업은 하지 못했다. 이후 대만에서 거주하며 라디오 DJ와 작가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여러번 홍콩을 거쳐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보려 했지만, 중국 정부의 거절로 번번히 실패했다. 이후 2016년 군소 정당 소속으로 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위구르족이면서도 근현대 중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흔치 않은 사례인데 이걸 뒤집어보자면 '''위구르족이 다른 한족과 함께 중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향해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물론 중국 정부 입장에선 그저 반체제 집단의 일원이라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하나의 중국]]'''에 걸맞는 인물인 셈이다. 여담으로 시위를 이끌 당시에는 제법 잘생긴 대학생이었던지라 연설을 하는 자리마다 여자들이 눈을 부릅뜬 수준으로 집중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pbs.twimg.com/CiEFbX1WUAA4XXS.jpg]] 위 두 사람과 더불어 3인방이라고 불린 베이징사범대 대학원생 '''차이링(柴玲)'''은 사태 직후 배를 타고 홍콩과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에서 하버드대 MBA를 졸업하고 미국의 컨설팅회사 ‘베인 & 컴퍼니’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한 차이링은 남편과 함께 ‘젠제이버(Jenzabar)’란 교육용 소프트웨어 기업을 운영 중이다. 현재 세 아이의 엄마인 차이링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로 살고 있다. 차이링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미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류샤오보와 나는 톈안먼에 탱크가 밀려들 때 마지막까지 같이 서있었다”며 “기념비적인 일이며 노벨위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차이링은 현재 ‘올 걸스 얼로드(All Girls Allowed)’란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중국의 강제낙태와 여아(女兒)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이링은 미국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매일 3500여명의 여아가 강제낙태되고, 500여명의 여성이 자살을 선택한다”며 중국의 여성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2012년에는 학살의 주범인 덩샤오핑과 리펑, 그리고 천안문 광장에 쳐들어온 군인들 모두를 용서한다고 밝혔다. 차이링 스스로가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원수를 용서하겠다는 취지인데, 당연히 왕단과 우얼카이시 등 다른 중국 민주 진영에 항의를 받자, 개인적인 용서일 뿐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바둑기사]]인 [[장주주]] 九단 역시 장주주가 민주화 요구 피켓을 들고 “기수”에 섰다는 이유로 수배령을 받았다. 이에 장주주와 연인 루이나이웨이는 [[1989년]]부터 [[한국기원]]에 오게 되는 [[1999년]]까지 [[홍콩]], [[대만]], [[일본]], [[미국]]을 거치며 [[중국 공산당]]의 감시를 피하는 도피생활을 하였다. [[1992년]] 제2회 [[응씨배]] 때는 [[장주주]]와 [[루이나이웨이]]한테 참가권을 줬다는 이유로 [[중국]] 바둑기사들이 단체 기권을 할 정도로 마찰이 컸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루이나이웨이는 '''여자기사로 유일무이하게 세계 바둑대회 4강'''에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제2회 응씨배 때 [[루이나이웨이]] 이후로 여자 바둑기사가 세계대회 4강에 간 사례는 단 한번도 없다.]([[오타케 히데오]] 九단한테 패해서 결승행은 실패) [[1993년]]에 4강전 종료 직후 장주주 - 루이나이웨이는 결혼을 하였다. 1999년부로 한국에 정착하였다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루이나이웨이가 중국 국적 대표로 참가하게 된 것을 계기로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중국 주석]]이 [[2011년]] [[특별사면]]했다. 루이나이웨이가 먼저 2011년에 중국으로 귀국하고, 장주주는 [[2012년]]에 중국으로 귀국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폭도들을 진압한 인민해방군 측에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 1,000명이 희생되었으나 폭도들은 고작 27명이 죽었다고 당초 보도했지만,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에 의하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뉴욕 타임스 지에서는 400명에서 800명, NSA에서는 약 1,000명, 중국적십자에서는 2,600명, 시위대의 주축을 이룬 학생들은 7,000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며, 부상자 수는 진압에 나선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약 7,000명에서 10,000명으로 추산된다. 정치권에서는 시위 진압 명령을 하달한 총리 리펑이 덩샤오핑을 이을 후계자로 부상하는 듯 했으나, 정작 덩샤오핑은 당시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중앙 정계로 진출시키고 실제로 후임 주석으로 취임하게 된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 사태에 참여해온 정치범 가운데 마지막까지 복역해온 먀오더순 씨가 27년만에 2016년 10월 15일에 출옥한다고 보도했으며, 석방 일시를 공식 확인해주지는 않고 있다. 2018년 12월 13일에 당시 정부 대변인으로서 터무니없는 축소 발표로 거센 비난을 받았던 위안무(袁木) 전 국무원 연구실 주임이 사망했다. 이후 인민해방군 안에서도 징계받은 인원이 사병 중에서만 천 명 단위로 있었다는 내부 문건이 폭로되었는데[*출처필요], 탄을 허공에 다 쏴버리고 빈 총 들고 다니다 걸린 인원, 총기를 일부러 고장내다 걸린 인원, 못 본 척 하거나 빠져나갈 길을 트여주다 걸린 인원, 아예 무전 꺼놓고 버티다 걸린 인원, 그냥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고 울다가 걸린 인원, 일부러 제 발에 총 쏘고 후방으로 후송되다 걸린 인원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